윤회와 카르마: 어쩌면 이번 생이 내가 그토록 원하던 인생 리셋이었는지도.

2024. 9. 4. 01:41인생 이야기

사주를 보며 내가 느꼈던 점 중 하나는 좋은 사주 혹은 나쁜 사주가 없다는 것이다.

사주는 그냥 사주일 뿐이다. 

 

물론 세속적인 눈으로 봤을 때 좋은 사주를  소위 부자 사주, 혹은 글자들이 잘 짜여있어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리지 않을 확률이 사주를 좋은 사주라 정의 내릴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결코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이다. 10년마다 두 글자로 기운을 가진 대운이 순환하며, 거기에 매년 세운이 바뀐다. 그 누구도 일생 내내 좋은 운만을 맞이할 수 없다. 아무리 부자 사주라 한들 흥망성쇠의 운을 피할 수 없으며, 재능이 뛰어난 사주라 해도 빛을 발하는 시기는 긴 고생과 인고의 시간 후에 찾아 올 수도 있다. 

 

한창 시간이 날 때마다 닥치는 대로 사주를 보며 시간을 보내던 시기, 누군가 운명이 있는지 나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약간의 거리를 둔다] 책의 저자인 소노 아야코님의 말을 인용한 적 있다. 

 

약간의 거리를 둔다 by 소노 아야코

운명은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부모를 선택할 수 없잖아요.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나느냐, 전 이것이 운명의 시작이라고 봅니다. 

 

 

지금의 나는 사주를 일종의 카르마의 성적표라 생각한다. 어떤 원인이었는지는 모르나 카르마로 인해 이번 생은 이러한 암시를 가지고 나의 의지의 개입 없이 특정 부모 밑에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운명적인 일인가. 이러한 순환의 원리를 기반으로 나는 윤회사상을 믿는다. 이 세상과, 이 우주가 충격적일 정도로 인과와 순환을 기반으로 정교하게 돌아가는데, 만약 죽음 후에 아무것도 없는 공(空)의 상태이고 한 인간의 운명을 구분짓는 잣대가 아무런 규칙이 없는 카오스의 확률에 불과하다는 가설은 나로서는 상상조차 어렵다. 그러므로 나는 그 사람이 타고난 환경과 사주가 전생의 카르마의 결과라고 추론한다. 

 

티베트의 육도윤회

 

 

내가 그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걷는 듯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종종 극단적인 상상을 하는 경우들이 많다. 이 생을 등지면 모든 문제와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윤회가 있다면, 망한 이번 생은 빨리 마무리짓고 새로 태어나서 인생을 리셋하고 싶다는 그런 충동 말이다. 익명을 빌어 고백하자면, 나 역시 이런 충동과 싸워가며 보낸 시간들이 있었다. 

 

그런데 만약, 이번 생이 전생의 내가 그토록 바라던 인생 리셋으로 얻은 삶이라면?

 

 

저 마인드셋으로 현생의 바라보면 현생의 소중함과 함께 책임감마저 느껴진다. 카르마, 한국어로 '업보'로도 해석되는 이것은 반복되며 인생의 다양한 파동 속에서 끊임없이 다양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 사주 역시 원국이 암시하는 그 사람의 카르마와 향후 닥치게 될 환경(대운)의 상호작용을 추측하고 읽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세부적으로 나뉘어지고 환경에 따라 새로운 카르마가 만들어지면서 극단적인 예로, 같은 사주라 하더라도 누군가는 살인자가 되고 누군가는 개복하여 수술을 집행하는 의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4차원의 시공간을 3차원으로 밖에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의 사고와 인지는 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고, 이 기제의 존재를 확인하고 완전히 이해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지극히 보통의 평균 지능을 가진 나로서는 겉 핥기도 못한 채 겨우 상상하는 수준에 그칠 뿐이다. 

 

운명이라는 것이 있고 카르마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 같다면, 이 순환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겸허히 나의 숙명을 기꺼이 겪어내며, 선한 카르마를 쌓는 것이 아닐까? 

 

 

꽤 오랜 시간 운명, 카르마, 그리고 삶의 자세에 대해 고민 해온 내가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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